" async="async"> ', { cookie_domain: 'auto', cookie_flags: 'max-age=0;domain=.tistory.com', cookie_expires: 7 * 24 * 60 * 60 // 7 days, in seconds }); [ 지독한 가난 ]- 기생으로 팔려간 소녀들 조선기생
본문 바로가기

건강 生테크/ 의학소식과 대체의학정보

[ 지독한 가난 ]- 기생으로 팔려간 소녀들 조선기생

 

 

1900년대 평양의 기생학교 - 출처 : 한국컨텐츠진흥원

 

 

 

 

 

 

 

 

조선 시대 기생

 

조선은 기생을 일종의 제도로 정착시켜 국가가 직접 기생들을 관리, 감독하였다. 기생은 기본적으로 관기로서, 관가에 등록이

된기생만이 기생 활동을 할 수 있었다.기생들을 등록한 대장인 '기적' (妓籍)에 한번 오르면 천인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관노비의정년은 50세까지였으나 자식을 낳더라도 신분은 대물림되었다.

기생은 교양이 있는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노래, 춤, 악기, 한문, 시, 서화(글과 그림)을 알고, 말씨나 행동이 고상하여야 했다

 

통 궁궐이나 관청에서 열리는 잔치에서 각종 춤과 노래를 담당하였고, 공식적인 업무 외에도 민간에서 벌이는 각종 풍류의

장에도  참여하였다. 기예가 뛰어난 여악은 세도가의 이 되기도 했지만 여성들만의 잔치인 내연 (內宴)에는 참여하였는데,

당시로서는 악, , 무의 능력이 누가 쉽게 대체할 수 없는 전문분야에 속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방 관기들의 경우 궁중잔치

일정에 따라 뽑혀 서울로 올라갔다가 행사가 끝난 뒤에 내려왔다. 이때 대궐 안의 잔치에서 춤과 노래를 배워 돌아온 기생들은

지방 예술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며 보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출처 : 위키백과 -

 

 

개화기 및 일제 강점기

 

 

평양의 기생학교

관기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형 당시 신분제 폐지로 함께 폐지되었지만, 기생들은 생계를 위해 지속적인 활동에 나섰다.

1908년 일제는 '기생단속령' '창기단속령'을 공포하며, 춤과 노래를 공연하는 '기생'과 성매매를 하는 '창기'로 구분지었다.

기생으로 영업하기 위해서는 경찰청에 신고하여 허가증을 받아야 했으며, 경찰청의 지시에 따라 조합을 설립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찬생한 기생조합은 유명 요릿집과 계약을 맺어 기생의 놀음을 중개하고 수수료를 받는 상업적 조직의 성격을 띄기 시작했다.  또 기생들은 기생조합의 중개로 도시 요리관과 같은 상업적 공간에서 영업을 하고 시간당 화대를 받는 형식으로 노동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받게 되었다.

 

경성에 생긴 최초의 기생조합은 1913지방 출신의 향기로 남편이 없는 기생을 모아 설립한 다동조합 (茶洞組合)과 경성 출신의 경기로 남편이 있는 기생을 모아 설립한 광교조합 (廣橋組合)이었다.

기생조합은 1915년부터 일본식 표현인 '권번'(券番)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출처 : 위키백과 -

 

 

 

 

 

 

- 1900년대 조선 권번의 기생 수업 - 출처 :  한국 컨텐츠진흥원 -

 

 

 

 

 

 

1900년대 가난때문에 집안에 밥먹는 식구를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어린 딸을 기생학교에 팔아 넘기는 일도 많았고

남의 가정에 어린 식모로 (노비) 팔려가기도 하던 시절의 여성은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위치란, 내일아침 어떻게 될지

자신의 운명을 알수 없는 그저 '따라야하는' 존재에 불과했다.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여성으로서 남성의 집으로 아이를

낳으러 시집가고 아들을 낳아야만 목숨을 보존할 수 있기까지 하였다.

 

 

 

 

 

 

 

 

 

 

출처 : 존오브라이언 조선의 여인들

 

 

 

 

 

 

 

 

 

일곱명, 여덟명, 열댓명의 아이를 낳아도 모두 목숨을 온전히 보전하며 잘 기를 수 없는 환경이었고 많은 질병과

그 질병들에대한 신속한 대처도 없던 시절이니 세명 낳으면 한 명이 죽고 다시 출산하고 딸만 낳으면 아들을 낳아

가문의 대를 잇기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던것과 진배없다. 그러면서도 집안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서 시어머니가

걸어온길, 어머니가 걸어온길 그대로 아니 그이상 감내하여야했다.

 

 

밥을 굶지 않고 끼니를 때울 수 있던 집안에서는 딸을 팔아넘기는 일은 드물었지만 간혹 술자리에서 딸을 남의 집안

후처로 넘기는 일은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기에만 딸을 주는 것이지 어린나이에 기생으로 팔려가는

사회적 위치는 여성 자신의 의사 반영이 단 1도 없었던것은 매한가지다.

 

 

 

 

 

 

출처 : 한국기록원

 

 

 

 

 

 

 

 

 

 

8살, 9살 나이에 어려운 집안때문에, 길바닥에 버려진 이유로 평양에서 서울로 팔려오는 기생, 여성을 팔아넘기는 전문인(?)

에게서 떠넘겨진 소녀들이 권번이라는 조선의 기생학교에서 그나마 배움의 길로 들어설수 있었을 것이고 이들은

다재다능한 분야에 활약했던 예능인들도 상당수 였다. 권번의 기생들은 조선 여성들의 구식 생활방식을 신식으로 바꾸는

역할도 했는데 의상, 헤어, 말투, 바느질솜씨, 요리, 노래, 춤 등의 유행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이기도 하였다.

 

 

 

 

 

 

 

 

 

 

 

 

집안에 갇혀서 노비처럼 여성의 일생을 살아가야하는 생활방식을 피해서 자발적으로 집에서

나오는 여성들도 생겼났다고 한다.

 

 

 

 

 

 

 

 

 

 

 

 

 

  

 

 

 

아직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았을 나이.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도 있었고, 도망친 소녀, 팔려온 처녀 등 온갖 여성들이 권번이라는 

기생학교를 통해 양반가 사람들과 교류 할 수 있었던 자리가 기생집이었지만 유명세를 타고 방송을 통해 유명해진 가수들이나 배우들이 등장하자 어린 여성들의 인식이 상당히 많이 달라졌고 1910년대 일제강점기와 겹치면서 여성들에게 정신적으로, 의식적으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수 있다.

 

 

 

 

 

 

 

 

- 조선 팔도에서 기생학교에 모여진 소녀기생들 - 출처 : 국립춘천박물관 -

 

 

 

 

 

 

 

당시 평양의 기생학교가 상당히 유명했는데 평양출신 기생은 서울 권번에서도 몸값이 제법 크게 나갔다고 하는데 이는 재주가

남달리 다방면에 뛰었났기 때문이며 미모 역시 출중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시절의 여성들이 현재 종군위안부 세대인 조모 즉 할머니세대이다. 여성들에게서 변화를 이끌고 희생을하며 인내심으로

현재 대한민국땅 최고의 지식인 세대인 [ 베이비부머 세대 ] 즉 어머니 세대가 출현할 수 있게 된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베이비부머들 - 출처 : 조선일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온갖 고초와 배고픔과 배우지 못한 서러운 한恨이 맺힌 할머니 세대들은 자식 공부에

열을 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가사의에 가까운 의문점은 6.25전쟁으로 인해 모든것이 폐허가 되고

사라져 아무것도 없다시피하던 대한민국땅에서 1980년대의 눈부신 도약을 시작으로 현재의 눈부신 발전을 일으키는

초석이 된 베이비부머들을 공부시킬수 있었을까 하는 부분이다. 

 

나의 지인중에도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20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2남1녀의 어린 자식들을 업고, 걸리고, 안고서

총알이 날아오는 들판을 목숨걸고 건너서 피난을 가셨던 할머니 세대 어르신이 계신데 현재는 보석상으로 강남에서

알부자로 소문난 분이시다. 전쟁으로 폐허가된 아비규환같은 세상살이를 견뎌내기도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을 가르치려는

일념 하나로 여성의 몸으로 더구나 남편도 없이 보석장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모두 박사학위까지 마치게 하신 분이다.

이런 패턴은 나의 지인 단 한 분의 이야기가 아닌데 대부분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이러한 방식의 경로를 거쳐서

학문에 열중하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다양한 문물들과 지식을 가장많이 습득할 수 있었던 세대들도 베이부머세대들인 샘.

 

  

 

 

 

 

 

한국의 베이비부머세대 대학생들 -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대학을 다니는 여러 사진들은 쉽게 매체와 인터넷을 통해 구해볼 수 있는데

전세계 국가들이 200년동안 갖은 노력을 해서야 겨우 이루어 낼수 있다는 국가적 발전을 우리는 불과

30년만에 이루어낸 것 아닌가. 뼛속까지 한국사람인 나도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하늘의 힘, 신神 마법이 아니라면 가능할 수 있는 이야기 인가... 의아해 하기도 한다.

 

 

 

 

 

 

 

 

1970년대 한국 이대생들의 모습 출처 : 유용원

 

 

 

 

 

 

 

 

이글을 보시는 네티즌님들께서도 사진들을 잘 살펴보시면 나와 느낌이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한국의 조상 더우기 여성조상님들은 대단하시다라는 말로 표현하기가 부족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남성들이 하찮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지면은 여성을 이야기 하려고 포스팅하고 있는 것이니 널리 양지하여주셔야 한다.

 

 

 

 

 

 

 

 

 

출처 : 이데일리

 

 

 

 

 

 

베이비부머 세대들께서는 여전히 교육열이 대단하시다는 것을 표를 통해 알수 있는데 이제 머잖아 조만간 이분들의 특히

사회적 활동이 가장 왕성하던 남성베이부머 그러니까 아버지세대들의 사회적 은퇴가 더 큰폭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경제적인 상황으로볼때 재차 여성의 능력 발휘해야하는 시기가 도래하는 방향으로 생각이 굳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한다. 항상 어려울때 어머니가 나서서 해결이 되었듯이 말이다.

 

 

 

 

 

 

 

출처 : 이데일

 

 

 

 

 

 

이렇게나 많은 능력있는 베이부머들이 사회적으로 모두다 활동을 멈춘다면 한국은 정지되고 말것이 뻔하다.

 

 

 

 

 

 

 

출처 : 한국경제

 

 

 

 

 

 

베이비부머들은 한국경제를 부동산과 건설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공공이익을 위해 개인의 권리를 포기 하는데도

시원시원하게 대답하고 있지만 현재의 혼란시기는 반드시 극복을 해야만하고 여성들이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가정꾸리기, 출산, 사회활동병행 등을 효과적으로 이루려면 국가의 도움과 베이비부머들의 상대적인 욕심들도

방향을 개선해야하지 않을까 한다.

 

황혼이혼이 가장 많은 세대도, 부부간의 성격, 대화에서 오는 불화와 부부관계같은 성적인 쟁점들도 의식의 전환이

진정한 공공성을 핵심으로 재탄생하지 않는다면 자식들 세대인 20대, 30대가 겪는 현재의 불안과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단함은

그 끝을 보기가 불가능하다고 할것이다. 성인이 되면 스스로의 성 性에대해 진지한 앎이 있어야하고 그것이 정신적인 측면과

어떻게 맞아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과거 베이비부머가 결혼하던 시절과 21세기 젊은이들이 결혼으로 생각하는 문화는 정반대의 포인에 와 있다.

대표적인 예가 [ 혼인신고 ]의 불필요성,  [ 출산에 대한 인식 ]이 그것이다

 

 

 

 

 

 

 

 

 

 

 

 

출처 ; 구글이미지

 

 

 

 

  

 

사진의 맨위의 골반사진은 남성의 골반구조 이고, 하단의 사진은 여성의 골반구조이다.

큰 차이점은 여성의 생식기 공간이 확보돼 있다는 점인데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세대를 거듭하게 되면

출산율로인한 국가적 경제를 논하다기만 하다가 여성의 골반이 남성처럼 바뀌게 될수도 있을 것이다.

절대로 출산하지 않는 여성으로 말이다.